그리움은 아무 이유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올해는 이상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사계절이 흘렀고 달력은 열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어딘가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매일 같은 카페에서 같은 라떼를 마시고, 같은 노선을 따라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출근길에 이어폰을 꽂아도, 익숙했던 노래들이 전처럼 가슴을 울리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하니까’ 사는 하루.
그게 내 일상이었고, 어느 순간 나는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감정조차 잊고 있었다.
그런 나를 흔든 건 한 장의 사진이었다. SNS 피드 속에 무심히 올라온 사진 한 장.
이탈리아의 작은 골목이었다. 햇살이 벽을 타고 흐르고, 알록달록한 빨래가 창밖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별것 아닌 그 장면이 어찌나 따뜻하고 자유로워 보이던지,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게 되었다.
‘나는 왜 여태 아무 데도 가지 않았을까?’ ‘꼭 멀리 가야 여행일까?’
그날 밤 나는 침대 옆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다. '여권 없이 떠나는 나만의 세계 여행, 한국에서 시작하기.'
그렇게 마음의 지도를 펼쳤다. ‘세계의 분위기를 닮은 장소들’을 찾아, 나만의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1. 부산 흰여울문화마을 - 이탈리아의 숨결이 흐르는 골목
첫 발걸음은 부산이었다. 몇 년 전 가족여행으로 잠깐 들렀던 그 도시.
그땐 바다만 보고 금세 돌아왔지만, 이번엔 좀 더 천천히,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다.
목적지는 영도 흰여울문화마을.
친퀘테레처럼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 마을이라는 말을 듣고 무작정 찾아갔다.
버스에서 내려 산복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그곳에 빠져 있었다.
양쪽으로 빼곡히 들어선 집들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바람은 소금기 어린 냄새를 품고 있었다.
가파른 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파란 대문 옆에 누군가 손글씨로 적은 문장이 반긴다.
'그냥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그 한마디가 가슴을 쿵 치고 지나갔다.
한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내려다본 바다는 말 그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시간’을 주었다.
커피잔을 들고도 몇 분을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 어디선가 이탈리아의 비에르나자 골목을 기억해냈다.
거기서도 그렇게, 벽에 기대어 파도를 듣던 오후가 있었다.
바다는 같지 않았지만, 내 마음이 느낀 풍경은 똑같았다.
아마 이게, 진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 서울 녹사평 - 도쿄의 밤거리에서 느꼈던 설렘
다음 여행지는 서울 녹사평.
이태원은 언제나 북적이는 이미지였지만, 녹사평역 뒤편으로 내려가는 언덕길은 완전히 달랐다.
적막한 주택가 속, 일본 드라마에서 본 듯한 카페와 이자카야가 하나둘 숨어 있었다.
내가 찾은 곳은 ‘오마카세 카레’라는 간판이 붙은 작은 가게.
문을 열자마자 향신료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작은 오픈 주방, 조용한 재즈, 그리고 일본식 목재 바 테이블.
모든 것이 도쿄 시부야 외곽에서 찾았던 어느 바를 떠올리게 했다.
주문한 유자 하이볼을 마시며, 나는 혼자 그 거리의 밤을 기억했다.
도쿄의 나카메구로에서 처음으로 혼술을 했던 그 날, 전혀 낯선 곳에서 처음 느꼈던 익숙한 외로움.
그 감정이 어쩌면 ‘자유’라는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녹사평의 언덕을 따라 걸으며, 나는 마치 한 편의 일본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밤은 조용했고, 네온은 낮게 깔려 있었다.
서울에 있으면서도 도쿄의 밤이 내 곁으로 살며시 내려앉은 그런 밤이었다.
3. 경주 황룡사지 - 교토의 정적을 닮은 시간
여행의 마지막은 경주였다.
역사 여행지가 아닌, 감성 여행지로서의 경주는 처음이었다.
황리단길의 북적임을 지나, 나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없는 길을 택했다.
분황사에서 황룡사지 터까지 이어지는 고요한 길.
가을비가 땅을 적시고 있었고, 잎이 반쯤 떨어진 은행나무가 길 양옆을 채우고 있었다.
비에 젖은 흙 냄새,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그리고 절 사이로 부는 바람.
그 길은 마치 교토의 진료지를 걷는 듯했다.
한적한 절에서 바라본 이끼 낀 돌담, 그리고 단정한 조경 사이로 흐르는 시간의 결.
모든 게 느리게 움직였고, 나도 마침내 ‘멈추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황룡사지 터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비로소 ‘다녀왔다’는 감정을 깊게 느낄 수 있었다.
여권 없이 떠난 여행은,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길이었다
돌아보면, 이번 여행은 거창한 것이 없었다.
비행기를 타지 않았고, 국경을 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그리워했던 감정의 조각들을 따라, 그 나라의 분위기를 닮은 장소들을 천천히 걸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참으로 진짜 같았다.
어떤 공간은 내 안의 외로움을 어루만졌고, 어떤 골목은 나도 몰랐던 설렘을 불러냈다.
어느 순간, 장소보다 중요한 건 내가 그곳을 바라보는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비행기 없이도 세계는 내 곁에 있었다.
조금만 다르게 바라보면, 작은 길 하나, 창틀 하나, 향기 하나가 어느 나라의 기억을 소환했다.
이 여정을 마치고, 마음은 다시 떠나고 있다
여권 없이 떠난 여행은 내게 아주 많은 걸 남겼다.
무엇보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나만의 감정들’을 깨웠다.
부산에서 나는 내 안의 따뜻함을, 서울에선 잊고 있던 설렘을, 그리고 경주에선 오래된 나 자신을 다시 만났다.
이제는, 정말 멀리 떠나고 싶어졌다.
프라하의 석양을 따라 오래된 다리를 걷고 싶다.
경주에서 느낀 정적이 내게 교토가 아닌 중유럽의 깊은 골목도 그리워하게 했다.
비 오는 날의 따뜻한 감성과 낭만. 그건 분명 프라하가 주는 또 다른 얼굴일 테니까.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도 가보고 싶다.
부산에서 마신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왠지 스페인의 느긋하고 자유로운 기운을 떠올리게 했다.
지중해 바람을 따라 골목을 헤매고, 한낮의 태양 아래서 흘리는 땀방울조차 그립게 느껴지는 건,
아마 이 여행이 내 감각을 다시 열어주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언젠가, 모로코의 시장 골목도 걷고 싶다.
녹사평의 작은 가게들 사이에서 느낀 ‘다름’이, 내게 더 낯선 세상으로 향하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여권이 없어도, 나의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여행은 다시 나를 세상으로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다음에는 진짜 비행기를 타고, 그러나 이 마음은, 이번 여행이 시작해준 것이다.
다음 목적지는 아직 미정이지만, 내 발걸음은 이미 어느 나라의 작은 골목을 걷고 있다.
그건 어쩌면, 여행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삶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