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한 일상 속, 여행이 필요해졌다
평소엔 그다지 여행을 자주 가는 편이 아니었다.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없다는 핑계, 일상을 벗어나는 게 부담스럽다는 생각, 그리고 어딜 가든 비슷할 거라는 막연한 무관심. 이상하게도 몇 해 동안은 그렇게 무기력한 채로 계절을 바꿔가며 살았다. SNS 피드 속 여행 사진을 보면서도 '예쁘다'고만 생각했을 뿐, 나도 가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무기력이 조금씩 피로로 바뀌었다. 모든 게 루틴이 되니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싶은 회의감이 생기고, 더 늦기 전에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찾아왔다.
하지만 비행기 티켓을 끊어 어디 멀리 떠나는 건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여행이라는 것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정말 떠나야만 여행이 되는 걸까? 이 질문을 안고 시작한 게 ‘시선 바꾸기’였다. 멀리 가지 않아도, 낯선 곳이 아니어도, 내가 그곳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충분히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일상이 낯설어질 때, 그게 바로 여행
처음으로 한 일은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산책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전까지는 이 동네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아침마다 바쁘게 출근하고, 저녁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주말 오전, 아무런 목적 없이 나와 동네 골목을 걸어보니 생각보다 새롭고 재밌는 것들이 많았다. 동네 안쪽에 이렇게 아기자기한 카페가 많았던가 싶었고, 예전에 있던 가게가 사라지고 새로 생긴 공간도 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아파트 단지 옆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고, 그 텃밭을 가꾸는 주민들의 모습도 보였다. 같은 장소인데 다르게 보이니까, 그 자체로 여행을 떠난 기분이 들었다.
그 다음엔 서울의 익숙한 동네들을 하나씩 다시 걸어보기로 했다. 예전엔 약속이 있어야만 찾던 곳들, 가령 서촌이나 연남동, 성수 같은 곳들을 혼자 조용히 다녀보았다. 한 번은 평일 오후에 서촌을 찾았다. 인파가 적은 시간대라 그런지 훨씬 더 여유롭게 느껴졌고, 조용한 골목 사이사이로 오래된 주택과 갤러리, 손글씨 간판을 단 가게들이 보였다. 그냥 눈에 띄는 가게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주인이랑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내고 나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게 바로 ‘여행 같았다’.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
그런 경험이 쌓이자, 일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앉아 있는 시간이 예전보다 길어졌고, 지하철을 탈 때도 창밖을 그냥 넘기지 않게 됐다. 동네 마트를 가도 사람들이 어떤 표정으로 장을 보는지, 어떤 계절 과일이 진열되어 있는지 눈여겨보게 됐다. 출근길에도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고개를 들고 하늘을 봤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매일 다니던 그 길에서 계절의 변화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벚꽃이 폈다 지는 순간, 나무 그늘의 모양이 달라지는 속도, 오후 햇살이 벽에 만들어내는 색감까지. 예전 같았으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장면들이다.
가까운 도시들도 일부러 다시 가보기 시작했다. 가령 인천 차이나타운, 수원 행궁동, 강화도, 남양주의 다산길 같은 곳들. 다들 한두 번은 갔던 곳들이지만, 이번엔 관람보다는 ‘관찰’에 초점을 맞췄다. 차이나타운에서는 간판을 유심히 읽고, 건물의 색감과 양식이 주는 감각적인 분위기를 음미했다. 수원에서는 성곽을 따라 걷다가 도심을 내려다보았고, 강화도에서는 흐린 날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완벽한 날만 여행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여행은 ‘어디’가 아닌 ‘어떻게’의 문제
이제 나는 ‘보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전에는 늘 ‘어디를 가야 할까’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볼까’를 고민하게 됐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이미지를 소비하고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눈을 들면, 우리가 사는 도시 안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내가 자주 걷던 길에도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지고, 골목 벽에는 누군가 남긴 문장 하나가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런 걸 보게 되는 순간이, 어쩌면 진짜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
지금은 오히려 ‘내 주변을 더 잘 알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과거에는 유럽이나 남미 같은 곳을 꿈꿨다면, 지금은 전라도의 작은 읍내, 강릉의 오래된 찻집, 통영의 시장 골목 같은 곳이 더 가보고 싶다. 그런 곳이야말로 진짜 이야기가 있고, 직접 보고 걸어야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먼 곳에 가게 되더라도, 그때 나는 예전처럼 유명 관광지를 급하게 찍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나라의 작은 골목을 걷고, 오래된 책방이나 동네 시장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어디에 있든 그곳을 ‘여행지’로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으니까.
여행 이후, 나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달라졌다
이번 여정을 통해 진짜로 바뀐 건 ‘시선’만이 아니었다. 익숙한 풍경을 다르게 보는 연습은,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예전에는 늘 비교 속에서 나를 바라봤다. 누구보다 특별한 일을 해야 하고, 뭔가를 증명해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 여겼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은 괜히 불안했고, 사람들과 다른 속도를 내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천천히 걷고, 들여다보고, 느끼는 시간들을 보내며 깨달았다. 꼭 멀리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반드시 특별할 필요는 없다는 것. 일상 속 작은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내가 몰랐던 공간을 발견하는 기쁨만으로도 충분히 삶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할까’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를 더 자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큰 꿈을 꾸는 것도 좋지만, 작고 구체적인 기쁨을 놓치지 말자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내가 나로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자고.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솔직하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들에 귀 기울이기로 했다.
일상 속 여행,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시작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여행을 가고 싶지만 여건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나처럼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보면 좋겠다. 평소 자주 가는 동네를 정해놓고 '오늘은 걷는 방식만 바꿔보자'고 다짐해보는 것. 혹은 같은 장소에서 평소에 보지 않던 가게나 간판, 벽화, 사람들의 표정에 집중해보는 것. 아주 작고 소박한 시도들이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진을 찍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평범한 풍경을 나만의 시선으로 담으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관찰력이 생긴다. 또는 조용한 시간에 혼자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거나, 오랜만에 손으로 글을 써보는 것도 일상 속 여행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여행은 결국 어디로 가느냐보다, 그 시간을 얼마나 의식적으로 살아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나는 이번에 정말 체감했다.
누군가에게 ‘좋은 여행’이란 반드시 먼 나라의 풍경을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여행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 태도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시작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