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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먹고 다녀온 여행

by 인데일리001 2025. 7. 2.

여행은 오감의 경험입니다. 그중에서도 ‘맛’은 많은 여행자들이 가장 기대하고, 가장 많이 기록하며, 가장 오래 기억하는 감각입니다. 어떤 도시를 떠올릴 때 우리는 곧잘 그곳의 음식부터 먼저 말하곤 합니다. “전주? 비빔밥. 강릉? 커피. 부산? 밀면.”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이번 여행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어떨까? 식당에 들어가지 않고, 유명한 먹거리를 건너뛰고, 입에 넣는 모든 걸 생략해본다면, 나는 여행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이 여행은 그런 궁금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각 없는 여행, 다시 말해 ‘아무 맛도 없는 여행’을 떠나보기로 한 것입니다. 여행은 감각을 채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감각을 비워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미각의 자리를 비워두고 그 자리에 어떤 감정과 기억이 남는지를 기록해보고자 했습니다. 목적지는 특별히 정하지 않았습니다. 익숙하지만 낯설고, 음식 말고도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도시라면 충분했습니다. 제가 택한 도시는 바로 군산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먹고 다녀온 여행
아무것도 안 먹고 다녀온 여행

식당 대신 공터에서, 시장 대신 바다 앞에서

군산은 ‘맛집 도시’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수십 명이 줄 서는 빵집이 있고, 일제강점기 당시 만들어진 일본식 가옥과 함께 오래된 짬뽕과 커피의 명소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여행에서 이런 요소들을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군산역에 도착한 뒤 첫 번째로 한 일은 지도를 꺼내서 식당, 카페, 마트 등의 아이콘을 모두 비활성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도시를 걸으면 지도는 텅 비어 보이지만, 오히려 그 빈 공간 속에서 새로운 장소들이 나타났습니다.

아침은 호텔 조식을 생략하고, 근처 공터 벤치에 앉아 따뜻한 물을 마시며 시작했습니다. 배는 고팠지만 머리는 맑았습니다. 먹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으니 생각이 고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식사를 하러 골목 안으로 들어갔고, 그 틈에 골목은 텅 비게 되었습니다. 그 빈 골목에서 저는 햇빛이 골목 끝을 어떻게 비추는지, 문 앞에 놓인 화분이 얼마나 오래 방치됐는지, 지나가는 고양이가 얼마나 느긋하게 걷는지를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도시의 진짜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점심 무렵이 되자 허기가 본격적으로 느껴졌지만, 대신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습니다. 시장을 지나며 나는 고기 굽는 냄새, 간장게장의 향기, 고소한 전 냄새를 맡았지만, 입을 다문 채 지나쳤습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냄새’라는 감각이 얼마나 폭력적으로까지 강렬한지 느꼈습니다. 음식의 부재는 후각을 지나치게 민감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 자극을 스스로 통제하면서 도시의 ‘공기’를 훨씬 더 뚜렷하게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해질 무렵 바다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공복 상태였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안했습니다. 음식 대신 바다의 냄새와 파도의 반복음이 나를 채워주었습니다.

음식을 비운 자리에 남은 풍경과 리듬

보통 여행을 다녀오면 우리는 사진첩에 음식 사진이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곤 합니다. 맛집의 외관, 음식의 접사, 함께 간 사람의 숟가락 각도까지도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음식 사진이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 유독 많이 찍힌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문득문득 마주친 고요한 공터, 빈 운동장, 옥상에서 본 바다, 오래된 간판, 빛이 새어 나오는 주택가 창문 같은 장면들. 이 사진들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 상태’를 담고 있었습니다. 식사라는 리듬이 없어진 하루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일상의 리듬을 만들어냈습니다.

식사를 하지 않으면 시간은 더 길어지고, 이동 속도는 느려집니다. 군산에서의 하루는 굉장히 느리고 유연했습니다. 3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2시간에 걸쳐 돌아보았고, 걷는 동안 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훨씬 더 자주 마주쳤습니다. 음식이라는 목적을 상실한 대신 ‘지나가는 길’ 자체가 목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초저녁 무렵이 되면 도시의 분위기는 한층 부드러워지며, 사람들은 음식점으로 사라지고 거리는 조용해졌습니다. 저는 그런 순간에 혼자 길모퉁이 벤치에 앉아 일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습니다.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배를 비우는 일’이 아니라, 도시의 시간대 중 우리가 잘 경험하지 못하는 틈새의 리듬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허기라는 감정, 감각이 아닌 질문으로 남다

물론 이 여행이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육체적인 허기는 분명 존재했고, 그것은 날이 어두워질수록 점점 커졌습니다. 저녁이 되면 저도 모르게 음식 배달 앱을 켜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왜 나는 이토록 음식을 통해 위로받고 싶어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허기는 단순히 신체적인 결핍이 아니라, 정서적인 결핍을 덮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음식 없이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결국 ‘위로 없이 하루를 버티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여행에서 음식을 뺀다는 건 생각보다 큰 실험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여행 기억이 맛에 기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맛’이라는 감각을 잠시 지워두었을 때 오히려 그 외의 감각들이 훨씬 뚜렷하게 살아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허기를 받아들이고 안고 가는 일 자체가 ‘여행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좀 더 성찰하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어디에 머물고 싶어 하고, 어떤 공기를 좋아하며, 어떤 시간대에 마음이 가장 안정되는지를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행의 본질을 다시 묻는 실험

아무 맛도 없는 여행. 그것은 단순한 음식 배제를 넘어선 하나의 철학적 실험이었습니다. 여행은 결국 어떤 감각을 확장하거나, 때로는 감각을 비워내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무엇을 먹었는가’를 중심으로 여행을 회상하지만, 그 중심을 지워버렸을 때 나타나는 새로운 층위의 경험은 여행이 무엇인지, 감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다시 질문하게 만듭니다.

음식을 제거했을 뿐인데, 나는 도시의 빛과 공기, 리듬과 사람, 그리고 나 자신의 감정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결핍의 경험이었지만, 그 결핍이 만들어낸 여백은 다른 어떤 풍성함보다도 값진 것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또다시 미식 여행을 떠나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아무 맛도 없이 도시를 걷는 실험을 반복하고 싶습니다. 감각이 지워진 자리에서 오히려 감각이 살아났던 그 하루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마치며

아무 맛도 없는 여행은 단순히 ‘먹지 않는다’는 실험이 아니라, 우리가 여행에서 진짜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하나의 창이었습니다. 맛이 없으니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되는 그런 하루, 도시의 냄새와 소리, 그림자와 하늘의 움직임이 더 가까이 다가왔던 그런 하루. 당신도 언젠가 한 번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도시를 걸어보는 여행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놀라울 정도로 당신의 감각은 깨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