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시작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비행기 티켓이 우연히 싸게 떠서, 친구의 추천으로, 혹은 영화 속 장면을 보고 그곳을 꿈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한 장의 사진’만 보고, 아무런 정보 없이 그 좌표를 찾아가 본다면 어떨까? 장소의 맥락도, 유명세도, 의미도 모른 채 단지 한 장의 이미지가 주는 느낌만으로 길을 떠나는 것. 그런 여행은 목적이 아니라 호기심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그 실험은 오래전 어느 밤,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창틀을 가로지르는 저녁 햇살, 모서리에 걸린 낡은 의자, 투명한 커튼의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어디든 이 공간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진 하단에는 위치 정보가 남아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시 ○○길 17.” 이 조그만 좌표를 가지고 여행을 계획해보기로 했습니다. 가본 적도 없고, 유명하지도 않지만, 단 한 장의 장면이 나를 움직이게 했습니다.
좌표 하나로 출발한 안동행 열차
서울에서 안동까지는 약 3시간 반이 걸립니다. 버스 대신 KTX와 시외버스를 연계하여 이동했고, 내리자마자 스마트폰에 저장해둔 주소를 지도로 열어보았습니다. 목적지는 안동 시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주택가 골목 한켠, 큰 간선도로와 주차장 사이에 자리한 오래된 단독주택 단지였습니다.
가는 길 내내 머릿속에는 사진 속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사진은 실내였고, 바깥의 풍경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떤 도시인지 짐작할 수 없었고, 날씨나 시간대에 대한 정보도 없었습니다. 오직 햇살의 각도, 의자의 배치, 커튼의 방향 같은 단서들만이 존재했습니다. 이런 단서들만 가지고 공간을 역으로 추론하고 상상하는 과정은 일종의 탐정놀이처럼 느껴졌습니다.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고, 나는 답을 모르면서도 한 장의 이미지를 단서 삼아 낯선 골목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사진 속 그 공간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외벽은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사진 속의 커튼과 창문도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그 순간 창문은 닫혀 있었고, 햇살은 사진 속의 각도와는 조금 다르게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의자는 보이지 않았고, 커튼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나는 그 장면이 담긴 물리적 장소에 도달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실망도 없었고, 오히려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던 장면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오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프레임 밖을 보는 여행
사진은 하나의 프레임입니다. 그리고 프레임은 대상을 잘라냅니다. 우리는 사진을 볼 때 그 안에 담긴 것만 봅니다. 하지만 그 장소에 실제로 가보면, 프레임 바깥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다가, 그 소설의 배경지가 된 도시를 직접 방문한 듯한 경험이었습니다.
사진 속 창문 옆에는 오래된 세탁기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벽돌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실재의 공간에는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사진이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여행에서 자주 ‘멋진 장면만’을 프레이밍해서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 멋진 장면의 주변에는 보통 일상적인 풍경이 함께 있고, 때로는 그 일상성이 전체 분위기를 좌우하기도 합니다.
그 날 오후, 나는 그 집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골목은 조용했고, 창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햇살은 조금씩 기울며 벽면의 색을 바꾸고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진 속 장면을 재현해보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빛의 각도도, 커튼의 움직임도, 감정의 온도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신 나는 사진이 기록하지 못했던 시간의 흐름, 그 공간의 정적,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소리들을 기록했습니다.
사진은 순간을 기록하지만, 여행은 흐름을 따라갑니다. 이번 여행은 그 ‘차이’를 경험하는 여정이었습니다. 나는 단지 하나의 장면을 좇아왔지만, 그 장면이 놓여 있는 주변의 삶을 보게 되었고, 그곳의 공기와 온도, 침묵과 빛의 변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보가 아닌 인상으로 떠나는 여행
우리는 보통 여행을 준비할 때 ‘정보’를 찾습니다. 어느 카페가 유명한지, 어떤 장소가 SNS에서 인기 있는지, 시간대별 최적의 동선은 어떤지 등을 탐색합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완전히 정반대의 방식이었습니다. 정보 없이, 단지 ‘인상’ 하나만 가지고 출발한 것입니다.
이러한 여행 방식은 무척 비효율적입니다. 어디가 좋은지도 모르고, 시간 관리도 어렵고, 목적지를 제외한 주변이 모두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이 오히려 여행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정보 없이 도착한 골목에서 내가 처음으로 느낀 것은 ‘공기’의 질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리뷰로는 전달되지 않는 그 동네의 공기 냄새, 조용한 발걸음 소리, 우편함의 녹슨 자국 같은 디테일들이 훨씬 더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또한, 단 하나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여행을 구성하다 보니, 그 한 장면에 대한 감정 몰입도가 매우 높아졌습니다. 나는 왜 그 사진에 끌렸을까? 왜 이 장소가 나를 이끌었을까? 그리고 도착한 뒤 그 장면이 실제로 나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는가? 이런 질문들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정보가 사라진 자리에 질문이 남고, 질문은 기억을 더 오래 머물게 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사진 속 장면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재현하려 하지 않았던 나의 선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똑같은 구도를 만들어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막상 그 자리에 서보니 그런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습니다. 대신 나는 그곳에서 가만히 머무는 쪽을 택했고, 그 순간이 사진보다 더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게 되었습니다.
한 장면이 이끄는 길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여행. 그것은 예측도 계획도 어려운, 그러나 매우 내밀하고 밀도 높은 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수많은 정보를 소비하며 여행을 구성하지만, 어쩌면 진짜 기억에 남는 여행은 단 하나의 인상, 단 하나의 이유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어떤 장면, 어떤 리뷰가 아니라 어떤 감정. 그런 출발점에서 시작된 여행은 훨씬 더 나만의 것이 됩니다.
앞으로도 나는 종종 이런 방식의 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스크린 속에 스쳐 지나간 한 장면, 우연히 넘긴 책장 속의 풍경, 영화 속 배경, 광고 사진 한 장이라도 좋습니다. 나를 멈춰 세운 한 장의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여행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여행이란 결국 나를 움직이게 하는 단 하나의 무언가를 따라가는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