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때로 스케일의 예술입니다. 웅장한 자연, 광활한 거리, 드넓은 풍경을 보고 싶어 우리는 움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한 손에 들어오는 공간, 발 한 뼘을 겨우 채우는 작은 장소들에도 수많은 이야기와 감각이 숨어 있습니다. ‘5평 미만의 공간들만을 걷는 여행’은 바로 그런 작고 섬세한 공간을 탐색하는 실험이었습니다.
5평은 약 16.5제곱미터입니다. 3인용 텐트보다 조금 크고, 원룸의 반 정도 크기입니다. 그 공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테이블 하나, 의자 몇 개, 또는 선반 한 줄 정도. 그러나 바로 그 제약이, 오히려 더 많은 집중과 관찰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람은 공간이 작아질수록 자세히 보기 시작하니까요.
이번 여행의 조건은 간단했습니다. “입장할 수 있는 공간 중, 실내면적이 5평(약 16.5㎡) 이하인 곳만 방문할 것.” 장소는 서울 성수동과 익선동 일대를 중심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유명한 명소보다는 작고 인지도가 낮은 가게, 갤러리, 공간을 위주로 걸었습니다. 그 결과, 작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성수동의 3.5평 서점 – 밀도의 미학
성수동 한 골목 안쪽,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샛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작고 반듯한 간판 하나가 눈에 띕니다. ‘책방 335’. 이곳은 단 3.5평의 작은 서점으로, 실내에는 총 50권 정도의 책만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기반으로 한 이 공간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독특한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작은 공간은 그 자체로 큐레이션을 강제합니다. 무작위로 쌓인 책이 아닌, 오직 주인장이 의도를 갖고 고른 책만이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습니다. 진열 방식 또한 흥미롭습니다.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쌓은 책들은 마치 작은 미술 작품처럼 공간을 채웁니다. 앉을 자리는 두 곳뿐이고, 복도 끝에는 자그마한 스피커에서 음악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서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정적’이었습니다. 큰 서점에서는 책장을 넘기는 소리, 발자국 소리, 계산하는 소리 등 다양한 소음이 섞여 있지만, 이곳에서는 오히려 침묵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책 한 권, 한 문장에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5평이 채 안 되는 이 작은 공간에서 40분 가까이 머물렀습니다. 그동안 읽은 페이지는 고작 몇 장이었지만, 그 시간은 매우 길고 밀도 있게 느껴졌습니다. 공간이 작으면 시간은 느려지고, 감각은 예민해집니다. 이는 작은 공간만 걷는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였습니다.
익선동의 2평 갤러리 – 시선의 프레이밍
다음으로 향한 곳은 익선동의 작은 골목에 위치한 비영리 미니 갤러리 ‘틈’. 입구부터 매우 좁아, 지나치기 쉽습니다. 내부는 단 2평 남짓. 그 안에는 사진 두 점이 벽면에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관람자를 위한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전시는 ‘낯선 일상의 조각들’이라는 주제로, 도심 속 구석진 풍경을 촬영한 작품들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전시장에서는 수십 점의 작품을 빠르게 훑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의도적으로 ‘단 두 작품만’을 걸어놓고, 관람자가 앉아서 오래 바라보기를 유도합니다. 작품 간 간격은 충분했고, 조명은 벽을 부드럽게 감쌌습니다. 사진은 익숙한 것들이었습니다. 전선, 세탁기, 방충망, 빗물 고인 웅덩이. 그러나 작가의 시선이 담긴 그 구도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익숙함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좁은 공간에 한 명만 입장할 수 있기에, 내부에 들어가면 자연히 조용해지고 감각이 집중됩니다. 나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이고, 의자에 앉아 사진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동안 ‘전시를 소비하는 태도’에 익숙했던 내가, 비로소 한 장면을 오래 바라보며 그 안의 색감, 질감, 구도, 의미를 천천히 탐색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미니 공간은 하나의 장면만을 담기 때문에, 공간 자체가 거대한 프레임 역할을 하게 됩니다. 프레임 밖의 세계는 차단되고, 단 하나의 사물 혹은 장면에 온전히 몰입하는 시간이 생깁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잃어버렸던 시선의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5평 이하 카페 투어 – 온도와 밀도의 감각
마지막으로, 작은 공간 중 가장 많은 장르인 ‘미니 카페’를 찾아봤습니다. 성수동과 익선동에는 3평, 4.5평, 5평 미만의 카페들이 많습니다. 보통은 테이크아웃 전문이거나, 좌석이 두세 개만 있는 형태입니다. 이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성수동 ‘카페 브루’였습니다. 4.2평의 공간에 커피 머신과 진열대, 의자 두 개, 그리고 협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나무 프레임의 창문이 정면에 뚫려 있었습니다.
이 공간은 사람이 3명만 들어가도 꽉 차는 크기였기 때문에, 손님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목소리는 자연히 낮아집니다. 바리스타는 테이블 너머 손님의 표정을 바로 마주하고 커피를 내립니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핸드폰을 보기보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거나, 안쪽의 벽면을 응시하며 기다립니다.
공간이 작아지면 사람의 태도가 바뀝니다. 겸손해지고, 조심스러워지고, 감각이 안으로 향합니다. 이는 물리적 크기가 주는 심리적 반응입니다. 미니 공간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관찰자로 머물게 만들고, 그만큼 섬세한 감정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날 마신 아메리카노는 특별할 것 없는 맛이었지만, 그 공간에서 마셨다는 사실 때문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작게 보일수록 오래 남는다
‘5평 미만의 공간들만 걷는 여행’은 결국 감각의 미세조정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시야가 넓고, 정보는 많고, 속도는 빠릅니다. 그러나 작고 제한된 공간은 감각을 좁히고,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며, 시선은 하나의 대상에 오래 머무르게 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여행의 본질을 되새기게 합니다. 반드시 멀리 가야만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게 보기 시작할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사실을요.
다음 여행에서는 스케일이 아닌 밀도로 여행을 계획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작고 조용한 공간들, 평수로는 작지만 기억으로는 오래 남는 장소들. 그런 곳들만을 연결하며 걷는 여행은, 분명 당신에게도 잔잔하고 깊은 감각을 선물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