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어르신이 알려준 서울, 나만 몰랐던 곳들

by 인데일리001 2025. 7. 14.

서울을 수없이 걸었지만, 누군가의 ‘서울’은 나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익숙한 거리를 지나면서도 어떤 이는 그 공간을 다르게 기억하고, 또 다른 감각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이번 탐방의 출발점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곳은 어디일까?'

정보는 70대 어르신 세 분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모두 서울에서 30년 이상 거주한 분들이었고, 현재는 은퇴 후 각자의 일상 속에서 서울을 천천히 누리고 계신 분들입니다. 이들에게 “지금도 가끔 찾는, 내게 편안한 서울이 있다면 어디냐”고 묻자, 예상 밖의 장소들이 등장했습니다. 대형 쇼핑몰이나 유명한 SNS 명소가 아닌, 생활과 기억이 배인 공간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공통적으로 추천된 세 곳을 직접 걸으며 탐방했습니다. 다음은 어르신들이 직접 선정한, 그리고 내가 새롭게 관찰한 서울의 로컬 장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어르신이 알려준 서울, 나만 몰랐던 곳들
어르신이 알려준 서울, 나만 몰랐던 곳들

성북동 한성대 후문 골목 – 기억의 속도로 걷는 길

첫 번째 장소는 성북동 한성대 후문 인근 골목입니다. 흔히 ‘성북동 나들이길’로 알려진 이 일대는 북악산 자락에 접한 언덕길과 오래된 주택가, 그리고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찻집과 작은 가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곳은 한 어르신의 말에 따르면 “딱 서울 같은 서울”입니다. 조용하고, 높낮이가 있고, 오래된 담벼락이 있는 거리.

골목 입구는 이화동처럼 관광객이 제법 있지만, 한성대 후문에서 북쪽 방향으로 오르면 관광객보다 동네 주민의 발걸음이 더 잦습니다. 담벼락 아래 화분들이 놓여 있고, 빨랫줄이 이어져 있는 풍경은 도시보다는 마을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어르신은 이곳을 “아직도 동네 느낌이 살아 있는 서울”이라 표현했습니다.

이 골목의 특징은 ‘경사’와 ‘간격’입니다. 길은 제법 가팔라서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으며, 사람과 담장 사이, 집과 집 사이의 간격이 촘촘하여 공간의 밀도가 높게 느껴집니다. 특히 한성대 후문 뒤편 언덕을 따라 난 골목길은 단순한 이동 통로라기보다 그 자체로 일상의 동선입니다. 동네 반찬가게, 벽돌 담장에 걸린 고무장갑, 고양이 한 마리가 누워 있는 현관 앞 등, 도시의 익명성이 걷히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그곳에서 본 풍경은 근사하거나 예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느리고 익숙한 무언가였습니다. 어르신이 추천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거리는 70대의 몸이 걸어본 속도에 맞는 거리였고, 그만큼 오래된 감각으로 구축된 공간이었습니다.

청계천6가 방산시장 주변 – 손이 기억하는 공간

두 번째 추천지는 방산시장입니다. 종로구 청계천6가에 위치한 이 시장은 포장재와 인쇄물, 제과 재료 상점이 밀집해 있는 전문 상가 밀집지입니다. 과거에는 인쇄소 거리와 연계되어 출판물과 지류 상품을 도매로 거래하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어르신 세 분 중 두 분이 “젊을 때 자주 갔던 곳인데, 아직도 가끔 가보면 좋다”고 말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장은 물리적 풍경이 아니라 ‘손의 기억’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낡은 셔터와 철제 문, 손때 묻은 저울, 상품명 대신 용도로 기억되는 플라스틱통과 종이상자들. 모든 것이 기능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이 거리에서는 ‘예쁘다’는 감각보다 ‘쓸모 있다’는 감각이 먼저 작동합니다. 많은 현대적 상업공간이 ‘보는 공간’이라면, 방산시장은 ‘쓰는 공간’입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한 어르신이 “여기서 아직도 노끈을 손으로 재서 팔아”라고 말한 대목이었습니다. 실제로 한 상점 앞에서는 고무줄과 노끈을 자로 재거나 손가락으로 감아 무게를 측정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계산기와 바코드가 없어도, 거래는 정확하게 이뤄졌습니다.

시장 안을 걷는 동안 말수는 적어졌습니다. 대신 손과 눈이 더 많이 움직였습니다. 어르신들은 필요한 것들을 고르는 동안에도 별다른 설명 없이 손으로 가리키거나, 제품을 직접 만져보고 고르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지식’보다 ‘감각’이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손이 기억하는 시장은, 익숙함과 신뢰로 구성된 도시의 작은 노트 같았습니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뒷골목 – 변화와 공존의 시간차

세 번째 장소는 다소 의외였습니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이 대형 복합 쇼핑몰은 흔히 젊은 층이 찾는 상업 공간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어르신의 설명은 달랐습니다. “요즘은 백화점보다 여기가 더 낫지. 식사도 되고, 의자도 많고, 병원도 가깝고.”

하지만 그 추천의 진짜 지점은 타임스퀘어 자체가 아니라 그 뒷골목이었습니다. 이곳은 대형 상업 공간과 전통 시장, 오래된 주택가가 엇갈려 있는 지역입니다. 주차장 진입로를 지나 뒤편으로 돌면 낡은 가로등 아래 순댓국집과 손세차장이 보이고, 그 옆에는 지어진 지 40년 이상 된 연립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이 지역의 특징은 시간차입니다. 초대형 유리벽의 백화점과, 30년 전 그대로인 주택이 몇 미터 간격으로 공존합니다. 건물은 달라졌지만, 거주민은 변하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골목길에서 어르신이 “여기 분식집 아직도 있어?”라고 물었고, 실제로 90년대 초부터 영업을 해온 ‘전통 분식’이라는 간판이 그대로 존재했습니다.

이 공간의 매력은 급격한 변화와 오래된 일상의 겹침에 있습니다. 타임스퀘어 내부의 소음과 냉방의 구조적 공간에서 빠져나와 뒷골목의 좁은 골목에 서면, 도시의 이중성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어르신에게는 이 공간이 단순히 복합시설이 아니라, 변화를 인식하고 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시간의 척도였습니다.

 

서울은 여전히 다르게 기억된다

이번 탐방을 통해 느낀 것은, ‘서울’이라는 하나의 이름이 서로 다른 기억의 층위에서 구성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추천한 장소들은 화려하거나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과 몸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공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걷는 동안, 나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서울을 다시 배우는 기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도시를 ‘최신성’이나 ‘트렌드’의 흐름으로만 해석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오래된 서울이 살아 있고, 그 기억은 지금도 현재형으로 존재합니다. 어르신의 서울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감각입니다.

다음 서울 산책은, 어쩌면 부모님이나 조부모님께 “서울에서 제일 좋아했던 곳이 어디였어요?”라고 묻는 일로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입니다. 당신이 몰랐던 서울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요.